서울 서대문 갈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서울 서대문의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이는 베스트 10 관광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목록은 한국관광공사의 인기 순위를 기반으로 선정되었으며, 독특한 자연 경관, 흥미로운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명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이 목록을 참고하시어, 멋진 추억을 만들어보세요.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봉원사(서울)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봉원사(서울) 소개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3년(889년)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 터에 창건하고, 반야사라 하였습니다.
제21대 영조 24년(1748년) 찬즙, 중암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영조는 친필로 봉원사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 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26대 고종 21년(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습니다.
1911년 주지 보담스님의 중수와 사지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1945년 주지 기월스님, 화주 운파스님과 대종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스님 및 개화파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1966년 주지 영월스님, 화주 운파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의 별처였던 공덕동 아소정을 옮긴 것입니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 대중은 60여 스님,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박송암 스님(2000년 2월 입적), 이만봉스님이 주석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이 있고, 신행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어린이 인경회 등 법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어 태고종 총 본산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봉원사에서는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인 영산재 보존회 주최로 세계평화 및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영산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영산재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도량을 시공을 초월하여 본 도량으로 오롯이 옮기고 영산회상의 제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입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함께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산재는 공연이 아닌 장엄한 불교의식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우리 모두가 불법 가운데 하나가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부처님 전(前)에 행하는 최대 최고의 장엄한 불교 의식입니다.
봉원사(서울) 기본 정보
무악산 동봉수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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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산 동봉수대 터 소개
변란 등을 횃불로 알려 위급함을 전하는 봉화터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5군데 있었는데, 그중에서 2군데가 안산(무악산) 정상에 있었습니다.
하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발, 직봉 78 간봉 22처를 거쳐 산 ‘동봉수(제3 봉수로)’에서 전해져 남산으로 최종 보고되었고 다른 하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발, 서해안을 따라 직봉 71 간봉 35처를 거쳐 안산 ‘서봉수(제4 봉수로)’에 전해져 남산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현재 2개의 봉수대 중 동봉수대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남산중앙봉수대와 연계하여 제3 봉수로의 봉화를 올리기 위해 봉수대가 멸실된 지 100년 만인 1994년 8월 30일 서대문 향토사연구회의 자문을 받아 복원하였습니다.
이 봉수대의 면적은 381㎡, 상부 연대(烟臺) 108㎡, 하부연대 307㎡ 봉화연조대의 높이 3.2m로 자연석을 사용, 축조하였습니다.
서봉수대는 동봉수대로부터 100m 떨어진 현 군부대의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악산 동봉수대 터 기본 정보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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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소개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독립문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주도로 세워진 기념물입니다.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인 갑오개혁이 외국 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세웠다.
독립문은 높이 14.28m, 넓이 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든 건축물입니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습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 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자로 한글로 [獨立門, 독립문]이라는 글자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문앞에는 영은문 주초 2개가 남아있습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 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근에는 서대문형무소가 있어 독립문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을 되새겨 보는 역사 여행으로 둘러보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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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기본 정보
백련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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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서울) 소개
서대문 백련산 자락에 있는 천년고찰 백련사는 신라 경덕왕 6년(747)에 진표율사가 창건하였습니다.
당시는 정토사라 하였는데 조선조 정종 원년에 백련사라 개칭하였습니다.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난 뒤에 요양차 이 곳에서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조선 임금 세조의 딸 의숙옹주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비통함을 달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여기서 해동묵(엄나무)을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습니다고 합니다.
그 후 의숙옹주의 원당으로 정하면서 이름을 백련사로 바꾸었습니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경복궁에서 볼 때 서쪽에 있어서 서방정, 정토사라고 하였는데 어느 여름날 연못에서 갑자기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고 명칭을 바꾸었습니다고 전합니다.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바로 재건하였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했습니다.
1965년 준공한 극락전과 아미타불이 있는 무량수전, 관세음보살이 있는 원통전을 비롯해 약사전, 관음전, 명부전, 삼성각, 독성각, 벙종각, 해탈루가 있고 정포대화상과 정토관세음 보살상이 있습니다.
수도권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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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서울) 기본 정보
서대문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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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독립공원 소개
독립공원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수많은 애국지사와 1960년대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던 서울구치소가 있었던 곳입니다.
서울구치소가 1987년 11월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감에 따라 감옥 7동, 사형장, 지하여자감옥 등을 복원하고, 탑골공원에서 3·1운동기념탑을 이전하였으며, 1992년 영은문 주초와 연계하여 1992년 8월 15일 독립공원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독립협회에서 건립(1895년)한 독립문(사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을 영접하던 독립관(당시는 모화관이라 하였음)을 복원(1996년)하여 그 내부에 순국선열위패 2,327위가 봉안되어 있고, 독립문 바로 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외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서재필박사 동상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자 서대문구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별도로 관리·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대문독립공원 기본 정보
운영 시간 상시 개방
주차시설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3.1독립선언기념탑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3.1독립선언기념탑 소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3.1 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습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의 터전인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옮겨 세우게 되었습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 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습니다.
3.1독립선언기념탑 기본 정보
독립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독립관 소개
독립관은 원래 1407년(태종 7년)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으로서 초기의 이름은 모화루였으나, 1429년(세종 11년) 확장 개축되면서 모화관이라 개칭되었습니다.
한말에 이르자 국제관계의 변화로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모화관을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세우면서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 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민권·자강 사상을 고취시키는 독립운동의 기지로써 사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 제국 주의자들은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으로써 이 건물을 철거해버렸다.
세워질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이었으며, 서대문 독립공원 조성 사업 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지상층은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位牌)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행사 및 유물보관을 위해 1995년 12월 28일부터 1996년 12월 31일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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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관 기본 정보
송재서재필선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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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서재필선생상 소개
전남 보성 출신으로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서재필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건립되었습니다.
선생은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윤치호, 이상재 등의 협력을 얻어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토론회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 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를 반대하는 등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경비에 바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나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 규격 - 동상높이 3.5m, 좌대높이 2.8m* 건립주체자 - 송재서재필선생동상건립추진위원회, (1990.04.07.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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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서재필선생상 기본 정보
순국선열추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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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탑 소개
순국선열추념탑은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옥고를 치른 조국 수난의 현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우리 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장렬히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1992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습니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는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좌측에는 항일의병 무장상, 윤봉길·이봉창 열사 상징상, 독립군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운동상이, 우측에는 3.1독립만세상,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 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바로 아래의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烈追念塔記)에는 일제의 침략부터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끊임없이 계속된 항일투쟁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국선열추념탑 기본 정보
해병대104고지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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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104고지전적비 소개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한군은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연희동 104 고지 일대를 완전히 요새화하여 강력하게 방어하였습니다.
이에 한강을 도하한 한국 해병대가 1950년 9월 21일 공격을 감행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고 104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이는 수도 서울 탈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이곳 격전지에서 3일 주·야간의 끝없는 혈전으로 1개 중대 중 26명만이 생존하는 처절한 혈전 끝에 이 고지를 탈환하였습니다.
수도 서울 탈환 작전에서 장렬히 산화한 젊은 해병대원들의 명복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서대문구 연희동 궁동산의 끝자락에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해병대104고지전적비 기본 정보
지금까지 서울 서대문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