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성 갈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대구 수성에서 꼭 가봐야 할 베스트 10 장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 순위를 참고하여 선정되었으며, 다양한 매력적인 명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여행을 준비하시는데 참고하시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대구부수성비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대구부수성비 소개
대구부수성비는 1869년(고종 6) 8월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한 김세호가 1870년에 대구부성을 보수하고 그 사실을 기리고자 세운 비입니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도 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쌓았습니다.
그 후 성이 오래되어 성벽이 훼손되었지만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김세호가 1870년(고종 7) 봄에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이러한 과정을 대구부수성비에 기록하였습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입니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습니다.
관찰사 김세호가 직접 비문을 짓고, 당시 공사 책임관이었던 최석로가 글씨를 썼다.
광무 10년(1906)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습니다가 1932년 대구향교 경내로 옮겨 놓았고, 1980년 영남제일관을 재현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대구부수성비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인 영영축성비와 함께 서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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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수성비 기본 정보
영영축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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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축성비 소개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 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입니다.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이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 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24보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습니다.
석성의 공사 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합니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습니다 합니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가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3년(1737) 대구 남문 밖 관덕정지에 세워두었으며, 민응수가 비문을 짓고, 백상휘가 글씨를 썼다.
1906년(고종 10) 당시 대구 군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헐고 도로를 만들면서 옛 달성군청(현재 대구 백화점)에 옮겼으며 이를 다시 1932년에 대구향교에 이전 보관되어 오다가 1980년에 현재의 위치인 영남제일관으로 옮겨져 대구부수성비와 함께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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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축성비 기본 정보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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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소개
대구의 신천이 흐르는 둔치 주변 이서공원에 한 채의 비각 안에 서 있는 3기의 비입니다.
왼쪽에 있는 것은 이공제비로, 대구판관을 지낸 이서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입니다.
당시 대구는 하천이 중심부로 흘러 홍수 때마다 큰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조선 정조 즉위년(1776) 대구판관으로 부임해 온 이서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알고 1778년 자기의 재산을 털어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난 주민들은 새로 만든 냇물을 신천이라 부르고, 제방의 명칭도 이공제라 한 후 정조 21년(1797)에 이 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원래 수성교 서쪽 제방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운데에 있는 비는 옆의 이공제비가 초라하여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는 의미로 순조 5년(1805)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오른쪽에 서 있는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광무 3년(1899)에 세운 비로, 고종 때 대구수령으로 있던 이범선의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1898년 큰 홍수가 일어나 이공제의 하류 부분이 파손되어 대구읍성이 위험하게 되자, 이범선은 빠른 기간에 보수공사를 완성하여 주민들의 근심을 덜어주었습니다.
이에 보답하고자 광무 3년(1899) 이곳 주민들이 비를 세웠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덕수이씨 종친회 주관으로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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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기본 정보
대구 고모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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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고모령비 소개
장년층의 애창곡 가운데 [비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이 만들고 1946년에 가수 현인이 불러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된 곳 고모령에 가면 비 내리는 고모령의 노래비가 있으며, 노래비 뒷면에는 노래비를 세운 사연이 적혀있습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습니다오 나도 울었오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고나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눈물 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던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 가면서 오늘 밤도 불러 본다 망향의 노래]옛날 고모령에는 남편 없이 어린 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와서 이 집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하다고 하여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게 되었는데 현재의 모봉, 형봉, 제봉이라는 3개의 산봉우리가 되었고 동생과 형이 서로 높이 쌓고자 시샘을 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여 자식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스러움으로 집을 나와 버렸다.
집을 나와 하염없이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이며 정상에 와서 집을 향해 뒤돌아 봤는데 그 이름이 뒤돌아 볼 고(顧) 어미 모(母)를 합쳐 고모라는 마을 이름도 이곳에서 나왔다.
지금은 경부선 때문에 산은 잘렸고 망우공원에서 파크호텔 팔현부락을 거쳐 고모역으로 이어지는 옛 고갯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대구 고모령비 기본 정보
수성못 유원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수성못 유원지 소개
수성유원지는 범물동 용지봉(629m)에서 북서부로 뻗어 내린 줄기의 하부에 위치하여 주변의 완만한 산지와 수성못을 끼고 자연의 경관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1925년에 조성된 수성못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저수량도 70만에 달하고 21만 8000㎡의 면적에 못 둘레도 2,020m에 이른다.
수성못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수 공급용으로 조성된 인공 못이었습니다.
지금은 수변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어 연중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성못 주변에는 벤치와 수목, 산책로 유람선 선착장, 우주선, 유람선, 바이킹, 범버카, 회전목마 등의 놀이시설을 갖춘 수성랜드가 어우러져 유원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트놀이와 오리배 등을 즐길 수 있는 수성못과 어린이 놀이터, 두산폭포 등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어 가족나들이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적격입니다.
수성못 미디어아트 음악분수는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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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못 유원지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suseong.kr/tour/
운영 시간 00:00~24:00
※ 수성 미디어아트 음악분수 운영시간은 홈페이지 참조 요망
주차시설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00:00~24:00)
모명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모명재 소개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참전하였습니다가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을 기리기 위하여 두릉두씨 문중에서 건립한 재실입니다.
[모명재]는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합니다는 뜻입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휘하 장수로 조선에 파견되었습니다.
두사충은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수륙지획주사라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두사충은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아들 두산·두일건을 데리고 매부인 진린도독과 함께 다시 출진하였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 두사충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였고, 조정에서는 두사충에게 대구 시내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 오게 되자 두사충은 자신의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세거하였습니다.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을 그리워하던 두사충은 최정산(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명나라 황제가 있는 자금성 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지어졌다.
또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있습니다.
모명재는 20세기 초 대구 지역의 재실 건축 형식을 잘 보여 준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객사가 헐리자 그의 후손들이 그 재목을 옮겨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으로, 건물이 너무 낡아 1966년 중수하였습니다.
대구를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 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재정비 사업을 통해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모명재 이웃에 한국전통문화체험관을 열고 다례한복체험이나 활쏘기, 동의보감 음식체험 등을 진행하고 있으니 전통관에서의 체험도 같이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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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blog.naver.com/mktcc
전화번호 053-666-4930
주차시설 가능 (공영주차장 이용)
쉬는 날 연중무휴
영남제일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영남제일관 소개
대구 읍성은 1590년(선조 23년)에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 12년)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은 이곳의 남문이었습니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습니다.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만촌동 현 위치로 그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으로, 형태는 처음의 모습을 참조하였으나 규모는 원래의 것보다 더 크다.
영남제일관은 역사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도 애용되고 있으며 야경의 모습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영남제일관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suseong.kr/tour
운영 시간 [2층 문루]
4월~11월 평일 09:00~18:00, 주말 10:00~18:00
12월~3월 평일 09:00~18:00, 주말 미개방
주차시설 가능
독무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독무재 소개
독무재는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하시찬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문인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추모 재실입니다.
하시찬은 1750년(영조 25) 지금의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나 당대의 석학이던 김경호, 송성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지금의 독무재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독무암루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고, 팔례절요 2권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동구 효목동 경북주유소 부근 경부선 철로 변에 있었으나 대구시 3차 우회도로가 개설되면서 1968년 4월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 되었습니다.
이건 시 독무재 서남쪽에 별도의 담장을 두고 사당인 경덕사와 팔례절요와 열암문집 판각이 보관된 장판각을 새로 지었습니다.
주변으로 동촌파크광장놀이공원과 국리대구기상과학관, 아양아트센터, 망우단공원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볼 만 하다.
독무재 기본 정보
들안길먹거리타운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들안길먹거리타운 소개
1980년대 후반부터 시내 중심가의 대형식당들이 도심의 교통체증 주차난 등으로 들안길로 하나 둘 모여들어 먹거리타운을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대구의 대표적인 먹거리 타운으로 발돋움하면서 수성구 명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준 높은 요리와 독특한 인테리어, 넓은 주차장을 갖춘 식당 150여 개가 들안길을 중심으로 대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한식, 양식, 일식 등 다양한 메뉴와 쾌적한 시설로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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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안길먹거리타운 기본 정보
고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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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당 소개
수성구 성동의 고산서당은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가 이곳에서 강학한 바 있으므로 150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숙종 16년(1690)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퇴계, 우복 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고산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영조 10년(1734)에는 동, 서재를 새로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고종 16년(1879) 지방 유림들을 중심으로 강학계를 조직하여 옛터에 강당만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습니다.
2020년 5월에는 사당인 숭현사를 복원하고 달성십현 중 동고 서사선을 추가 배향하며 성현 3분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 옛 사당 자리에는 이황·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서 있습니다.
고산서당의 보호수는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로 보호수 중 큰 나무는 이황이 서원을 방문하였을 때 직접 심은 나무로 알려져 이황나무라 불린다.
나머지 나무 역시 정경세가 대구 부사로 있을 때 이곳에서 강학한 것을 기념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경세나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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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당 기본 정보
지금까지 대구 수성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