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 갈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충북 충주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충주 최응성 고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 최응성 고가 소개
※ 개인 사유지로 관람이 불가할 수 있음
최함월 고택(최응성의 생가)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위치한 조선시대 고가로 충북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 문장가인 최응성의 생가이며 원래 살미면 무릉리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이게 되자 지금의 용천리로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물 배치는 기억자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에 일자형의 행랑채가 있고, 좌측으로는 함월이 서재로 사용하던 염선재가 있으며 우측으로는 기억자형의 창고가 사괴석 담장으로 일곽을 만들어 함께 배치되어 있습니다.
황토와 막돌로 쌓은 담벼락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본채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고택 앞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어 상류층 양반가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연못가에 위치한 조그만 정자 함월정과 가운데의 화단은 중후한 멋을 풍기는 고택과 잘 어울린다.
또 연꽃과 수련 등의 수생식물들이 있어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건물 뒤쪽 사당은 울창한 숲에 있어 조용함과 엄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고 본채 건물은 자연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건물을 지어 안정감이 넘친다.
본채 앞의 마당에는 수십년을 사용해온 우물이 여태까지 물을 쏟아내고 있으며 작은 생활박물관에 온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농기구들이 놓여 있습니다.
또한, 최함월 고택의 돌담을 따라 야산과 밭이 이어져 있어 정겨운 시골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고풍스러움을 뽐내고 있는 이곳은 고택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인정 받고 있는 고택으로 중부권의 고택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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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최응성 고가 기본 정보
봉황자연휴양림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봉황자연휴양림 소개
충주 울궁산(398m)에 자리잡은 휴양림으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입니다.
산림욕장은 주로 참나무, 소나무, 낙엽송, 밤나무가 주를 이루고 등산로 겸 산책로는 경사가 완만해 어린이들도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습니다.
산림욕장 입구에 계곡이 흐르고 오토캠프도 가능하다.
낯설지 않은 친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인근에 월악산 국립공원, 충주호, 수안보온천, 능암온천, 탄금대 등 주변볼거리가 많은 지역으로 가족 및 단체 휴양지로 적절하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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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자연휴양림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foresttrip.go.kr/indvz/main.do?hmpgId=ID02030051
운영 시간 [숙박] 당일 14:30~익일 11:30
주차시설 주차 가능
포암산(충주)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포암산(충주) 소개
* 조령 5악으로 꼽히는 명산, 포암산 *
인근의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등과 함께 조령5악으로 손꼽히는 포암산(962m)은 월악산국립공원 내 충주시 상모면과 경북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의 주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늘재(525m)를 경계로 월항삼봉과 연결됩니다.
소백산의 중심부로 월악산(1,094m), 주흘산(1,108m), 백화산(1,064m)과 더불어 묘한 산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곳의 하늘재는 본디 한훤령으로 불리워졌으며, 조선시대에 조령 관문이 뚫리기 전까지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그 역할이 사뭇 지대했던 고개입니다.
또한 하늘재 밑의 미륵사지는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던 약 13,223m²(4천여평) 규모의 대찰로 주흘산을 진산으로 하여 좌우로는 신선봉과 포암산을 끼고 멀리 월악산을 조산으로 하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산은 계곡산행과 능선산행을 병행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 포암산의 또다른 볼거리, 미륵사지 *
하늘재 밑의 미륵사지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약 4천 평의 대사찰로 주흘산을 진산으로 하며 좌우로는 신선봉과 이 산을 끼고 멀리 월악산을 조산으로 하는 중심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보물인 5층석탑과 미륵석불이 있습니다.
미륵석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북향석불'입니다.
이 석불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습니다는 전설을 담고있어 마의태자 자화상으로도 불린다.
포암산(충주) 기본 정보
충주 탄금대와 탄금대공원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 탄금대와 탄금대공원 소개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입니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1,400년 전인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이라는 악사는 조국의 멸망 후에 이곳에 강제로 이주당한 수많은 가야인들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우륵은 탄금대 절벽바위를 주거지로 삼고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야금을 타는 것으로 소일했습니다.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 들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부락을 이루고 그곳을 탄금대라 명명했습니다.
탄금공원 한 켠에는 충혼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주 출신 전몰 장병과 경찰관, 군속, 노무자 2838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6년에 세운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향사를 지낸다.
탄금정과 충혼탑 중간에는 항일시인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어 발길을 또 한번 붙잡습니다.
공원 군데군데에는 조각작품이 들어서 있고, 소나무 군락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단란한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공원으로 말끔히 단장된 탄금대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순국의 현장이며, 현대로 넘어와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숨져간 넋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장중한 남한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칠금동 대문산 기슭의 탄금대.조선조로 넘어와서 임진왜란을 맞아 탄금대는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격전지로 변모합니다.
신립장군의 가슴아픈 패전이 이곳에서 기록됩니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5만명의 왜군이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가자 신립장군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방면을 지키게 됩니다.
신립장군은 지형을 정찰한 뒤 조령에 진지를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우리 군사들의 훈련이 부족해 사지에 몰아넣지 않으면 투지를 드높일 수 없다고 판단, 28일 새벽 8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추의 한을 품고 남한강에 투신자살, 패장의 불명예를 쓰고 만다.
탄금정 정자에서 북쪽으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열두대라는 층암절벽이 기다린다.
왜군과의 격전 당시 장군이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해서 열두대라는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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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탄금대와 탄금대공원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chungju.go.kr/child/contents.do?key=2335
주차시설 있음
쉬는 날 연중무휴
호암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호암지 소개
달천 평야(모리래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준공된 저수지입니다.
당시 충주수리조합장이었던 일본인이 충주면(현 충주시) 주민에게 강제부역을 시켜 11년간의 공사 끝에 준공하였는데 기계와 장비 없이 삽과 지게, 우마차 등을 이용해 사람의 손으로 조성한 저수지라 합니다.
1933년 5월 1일에 세운 ‘호암지 수리조합장 사업 공공기념비’에 호암지 조성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호암저수지에는 2008년 호암생태공원이 들어섰다.
호암생태공원은 연꽃·부레옥잠 등 수생식물로 꾸며진 수생생태원을 비롯하여 생태전시관, 생태연못, 습지수생식물원, 전망대, 관찰데크, 산책로(2.7km), 식물섬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호암지 주변으로는 호암예술회관·호암체육관·택견전수관·우륵당·충주시청소년수련원 등 충주시의 주요 문화·체육시설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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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지 기본 정보
충주호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호 소개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호수, 충주호
충주댐 건설로 생긴 충주호는 ‘내륙의 바다’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
댐 건설로 충주, 단양, 제천 등 3개 지자체에 걸쳐 66.48㎢가 수몰됐고, 약 5만명의 수몰 이주민이 생겨 고향을 잃은 이들에겐 가슴 아픈 기억의 장소지만,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습니다.
충주, 단양, 제천 3개 지자체에 걸쳐 있는 호수이기에 주변으로 월악산국립공원, 송계계곡, 청풍 문화재단지, 단양 8경, 고수동굴, 구인사, 수안보온천, 노동동굴 등 수많은 관광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충주호의 또다른 재미, 충주호유람선 *
충주호에는 충주댐 본 댐의 충주나루, 월악산 비경 아래의 월악나루, 청풍문화재단지 인근의 청풍나루, 단양팔경의 구담봉, 옥순봉이 있는 장회나루, 단양읍의 단양나루 등 총 5개의 유람선 선착장이 설치되어 있어 충주호 관광선을 이용하여 호반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충주댐 나루에서 장회나루까지의 뱃길은 대략 1시간 30여 분이 소요되는 장거리 코스이며, 수려한 선상 관광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관광 코스입니다.
충주호와 월악산 영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월악나루 주변의 풍경뿐만 아니라, 청풍나루~장회나루 구간에 있는 기암절벽의 암봉들과 어우러진 단양팔경(구담봉, 옥순봉) 선상 관광은 충주호 뱃길 여행 중 가장 빼어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호 기본 정보
충주 박팽년 사당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 박팽년 사당 소개
* 충신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박팽년사우 *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충신인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775년(영조 51)에 창건되고 1968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이 사우는 전면 3간 측면 2간의 목조 8작 집으로, 흙과 돌을 섞어 담장을 둘렀으며 입구에 일각대문이 있습니다.
사당 건물 정면에는 현 위치에서 약 20m 정도 떨어져 있던 건물을 1977년에 다시 이전 복원한 소슬 3문의 충신문이 있는데 중앙칸에 박팽년의 충신지문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사육신, 박팽년에 대하여 *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으로 집현전 학사가 되어 여러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참화를 입은 사육신의 한 분입니다.
충주 박팽년 사당 기본 정보
청룡사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청룡사지 소개
고려말 청계산 중턱에 작은 암자가 있던 것을 이태조의 사부 보각국사가 은거하므로, 태조가 대사찰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합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부근에는 보각국사의 부도탑인 정혜원융탑과 석등, 정혜원융탑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정혜원융탑은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으로 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탑명을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습니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으며,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시대 석등의 기본형인 평면정사각형입니다.
아래부분에 한마리 사자의 모습이 매우 힘차게 표현되어 있어 사자석등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지 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자석등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정혜원융탑비는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한 비로 고려 우왕 9년에 국사가 되어 73세에 입적한 사실과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기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 윗부분의 장식물인 개석이 없는 대신에 비신 양 끝 부분의 모서리를 깍은 귀접이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 청룡사지에 전하는 전설 *
소태면 오량리에 청계산이 있는데 명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조 말엽 민씨네가 득세를 할 때 청룡사 윗자리에 명당이 있습니다 하여 민씨네가 이곳으로 이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수설에 따르면 명당자리 부근에 절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허씨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세력이 컸고 사찰의 운영권도 그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절을 없애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씨 가에서는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절에다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이 절 지붕에서 살 던 큰 뱀이 내려와 불을 지른 사람의 앞을 가로 막으니 한 사람은 놀라 자빠져 피를 토하며 죽고, 또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절 위에 쓴 민씨 산소에 벌초를 하러 오는 사람까지도 오기만하면 생명을 잃고 갔기에 산소도 묵모이로 옮겼다고 합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보물 (1979년 05월 22일 지정)
청룡사 옛 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 돌이 서 있습니다.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깎아서 마무리했습니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현재 다시 새로 창건한 청룡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보각국사탑과 그 앞의 사자석이 함께 있습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 보물 (1979년 05월 22일 지정)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에 있는 옛 절터입니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남아있습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입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습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 아래에 사자 조각이 있어서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입니다.
탑비의 기록으로 볼 때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옆에 새로운 청룡사가 세워져서 현재 불사가 진행 중입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 국보 (1979년 5월 22일 지정)
*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 *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부도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습니다.
보각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습니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습니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 보각국사정혜원륭탑의 구성과 의의 *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습니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 하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부도는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되지 않는 부도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
- 충청북도문화재자료 (2006년 03월 03일 지정)
충주시 소태면의 청룡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입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종 모양으로 지붕돌, 팔각원당형 부도재 등의 유물과 함께 보호각 안에 놓여 있습니다.
전체 높이가 1.98m로 비교적 대형 크기에 속합니다.
탑의 몸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사각형의 지댓돌 위에 각진 모양의 굄대가 새겨진 밑받침돌을 2단 놓고 탑의 몸을 올렸다.
탑의 몸 앞면 가운데 부분에는 문자를 새긴 흔적이 있습니다.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는 쓰인 글씨를 쉽게 알 수 없으나 ‘적운당사리탑(跡雲堂舍利塔)’이라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근처에 근래에 지은 청룡사가 있으며 많은 불교문화재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청룡사지 기본 정보
충주 산성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 산성 소개
*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삼국시대 산성, 충주산성 *
충주산성은 충주시 안림동과 직동 및 목벌동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성은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아진 퇴뫼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성 재료는 석재를 고루 쌓아 전형적인 고식을 보이며 성 둘레는 83년 충주시 조사에 의하면 1,145m이며 중간 중간이 무너지고 5개소에 775m의 성곽이 남아 있으며 성안의 넓이는 46,524㎡이고 성벽의 높이는 7~8m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안에는 우물자리가 2개소 있는데 현재 물은 나지 않으며 동서의 산능선상에 문지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습니다.
또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 및 기와쪽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충주는 옛날부터 삼국시대 각국의 변경으로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 흔적이 고구려의 유산인 중원고구려비, 신라의 유산인 누암리 고분군이며 충주산성 또한 그같은 사례입니다.
축성에 대한 유래는 기록이 분명치 않아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만에 축성하였습니다 하여 일명 마고성이라고도 하며, 또한 백제 구이신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습니다고도 합니다.
* 몽고군과의 격전지로 추정되는 산성 *
충주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4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지 70여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 격려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습니다.
다음 해 2월에 김윤후를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삼았고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으로 하였습니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라대도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습니다.
* 마고선녀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7일 만에 축성하였습니다 하여 마고성(麻姑城)이라고도 합니다.
《조선약사(朝鮮略史)》에는 백제 구이신왕 시대에 쌓은 것으로 개로왕 21년(475)에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습니다고도 합니다.
개로왕이 바로 이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에 도읍을 옮기려 하였습니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됩니다.
고려시대에는 왕을 칭하던 자가 점거하고 있었습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충청북도 기념물
지정연도 : 1980년 1월 9일
시대 : 삼국시대
종류 : 성지
크기 : 면적 1,165㎡
충주 산성 기본 정보
충주 미륵대원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 미륵대원지 소개
미륵사지는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죽향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미륵리 사지(彌勒里寺址)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석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하늘재를 넘자마자 지세를 확인하고는 지금의 미륵리에 석불을 세워 절을 만들었습니다고 합니다.
충주 미륵사지는 청주대학에서 1977년에서 1978년의 제2차 발굴조사를 통해 절의 명칭이 미륵대원사였음이 밝혀졌고, 1980년에 이화여대에서 3차 발굴을 통해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다가 소실되어 현재의 석조물만 남았습니다는 것을 밝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156) 기록에 의하면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 교류하게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한강을 통해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 미륵사지의 다양한 유물과 의의 *
미륵사지는 14,000평 정도의 직사각형 절터에 일탑일금당이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미륵리사지 내에는 5층 석탑(보물)과 석불입상(보물)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3층 석탑이 있습니다.
중원 미륵리 사지는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한 유적입니다.
또한 미륵사지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습니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입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주 미륵대원지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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