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 갈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경남 의령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정암루(솥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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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루(솥바위) 소개
* 아름다운 경관으로 발길을 잡는 곳, 정암루
남해고속도로 군북IC에서 내려 10분가량 달리면 충의의 고장 의령의 관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남강물 유유히 흐르는 철교 아래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물 위에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이름이 바로 솥바위입니다.
물에 드러난 형상만 보고도 금방 솥 모양임을 알 수 있고, 물아래 감춘 형상 또한 세 발을 달고 있는 모습으로 영락없이 솥 모양이 나타난다.
이곳은 그 옛날 선인들이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나루터지만 임진왜란 때는 나루에서 곽재우 장군이 왜장 혜경이 이끈 수많은 왜적을 잠복 끝에 몰살시킨 승전지로도 유명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더욱이 정암루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보면 풍류가 절로 피어나 그만 노랫가락이 나올 법한데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모습 또한 마냥 여유롭다.
이것도 잠시 지금은 시원하게 뚫린 2차선 아스팔트 도로 위를 분주히 오가는 차량의 행렬을 쫓다 보면 그 옛날 왜병들이 경상도에서 전라도의 곡창지대로 들어가려 기를 썼던 중요 길목임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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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루(솥바위) 기본 정보
자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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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굴산 소개
* 다양한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의령의 진산, 자굴산 *
자굴산은 해발 897m인 경남의 중심부인 의령의 진산입니다.
인접 시·군과 근거리에 위치하고, 등산객 취향에 따라 난이도(급경사,완경사)를 조절할 수 있어 다양한 산행 코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꽃길과 숲길, 오솔길 등 사계절을 사색할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산중턱에는 옛날 신선이 놀고 갔다는 강선암과 갑을사지(甲乙寺址)·보리사지·양천사지 등의 사찰 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 산기슭에는 약 3m 깊이의 동굴과 금지샘이라는 천연동굴샘이 있습니다.
금지샘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이곳에 침입하여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물이 갑자기 말라버렸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또 조선시대 남명 조식이 그 경관에 홀려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노닐었습니다는 명경대도 있습니다.
* 자굴산의 또다른 볼거리, 금지샘에 관한 설화 *
자굴산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에 3m 깊이의 동굴이 있으니 그 동굴 속에는 천연적으로 생긴 샘이 있어 이 샘을 사람들은 금지샘이라 부른다.
보기에도 한 바가지 퍼내면 없어질 물 같은데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줄지 않습니다.
어떤 한발에도 물이 줄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폭우에도 물이 불어나지 않습니다고 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명주실 끝에 돌을 메달고 실꾸러미를 풀어 넣어서 깊이를 재어 보았더니 실꾸러미 3개가 풀리고 나서야 겨우 샘바닥에 닿았는데 그 끝이 수십리 밖인 정암진에서 나왔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굴속에서 연기를 피웠더니 그 연기가 남강의 솥바위가 있는 곳에서 나오더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이 샘이 그만큼 깊다는 뜻으로 꾸며낸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굴에 연기를 피워, 그 연기가 남강의 솥바위 있는 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샘이 깊다는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이 침입하여 산세를 보고 요새를 만들기 위해 자굴산으로 올랐다.
청나라 군사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어떻게 된 셈인지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를 않던 금지샘의 물이 금새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모두 말라 버렸으니 이는 필시 샘물도 적군의 말에게는 물을 줄 수 없다고 하며 무언의 항쟁을 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나라군이 자굴산에 진을 치지 못하고 갔다고 합니다.
이 뒤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자굴산의 금지샘을 더욱 신령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고 합니다.
자굴산 기본 정보
봉황대(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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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의령) 소개
의령읍에서 약 23km 떨어진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의 벽계저수지 초입에 있는 단애(斷崖)입니다.
거대한 기암괴석이 일대장관을 연출하는 봉황대는 모양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습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 사이로 자연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 또 다시 동굴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는 사시사철 넘쳐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에게 시원한 약수를 제공합니다.
봄철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경관이 일품이며,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봉황대의 진면목은 가을의 단풍입니다.
만산홍엽에 뒤덮인 봉황대에 비치는 저녁노을은 가히 선경을 보여준다.
주변에도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다.
찰비계곡 내 무운바위, 용소, 각시소, 개기바위가 있으며, 촌닭백숙, 염소 불고기 등의 별미도 맛볼 수 있습니다.
가족단위로 관광과 휴양하기 좋아서 주말이면 인근 도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입니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에 누대 하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것은 봉황루입니다.
봉황루는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인 누정(樓亭)입니다.
봉황대의 볼거리 중 또다른 하나는 봉황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일붕선교종 사찰 일붕사입니다.
이 사찰의 대웅전은 동양 최대의 동굴법당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굴법당의 규모는 넓이 456m², 높이 8m에 이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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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의령) 기본 정보
백산 안희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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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생가 소개
* 조선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여주는 곳 *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입니다.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와가 및 초가로 되어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구조입니다.
실내는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향으로 있어 남측면이 남향으로 1칸 마루가 사랑의 역할을 합니다.
평면도 전후 툇간이 발달하여 겹집 형식으로 발전하여 기능이 다양한 방이 필요하지만 별동(別棟)을 만들지 않고 한 건물 안에서 처리한 조선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입니다.
사랑채는 안채 정면에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하여 대지가 좁지 않은데도 안채와 바짝 붙어 있습니다.
정면 4칸의 전후 툇간으로 구성된 3량 초가집으로 안채처럼 남측면에 마루를 두었습니다.
* 독립운동의 선봉장, 백산 안희제 선생에 대하여 *
백산 안희제선생은 1885년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창남학교를 창설하고 1908년 의신학교를 창설, 1909년 동래구명학교 건립, 대구교남학교 건립 등으로 신학문 보급에 힘썼다.
27세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였습니다.
30세에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본금을 마련하였으며, 기미 육영회를 조직하고 1926년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금되었고, 1943년 만주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되었습니다가 출옥 4시간만인 1943년 9월 2일에 사망하였습니다.
백산 안희제 생가 기본 정보
한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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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산 소개
* 깊은 산세와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는 산, 한우산 *
한우산(836m)은 자굴산으로부터 이어지는 맥입니다.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어 곳곳에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절승이 즐비하며, 가운데 계곡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계곡은 여름에도 찬비가 내린다 하여 찰비계곡이라고도 부르며 한우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길이가 3km에 이른다.
곳곳에 전설이 서려 있는 농소와 각시소 등이 운치를 더하는 가운데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싱그러운 숲이 울창함을 더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
겨울이면 계곡 따라 즐비한 바위 틈새에서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려 겨울의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또한 영화 이광모 감독, 안성기·송옥숙 주연의 "아름다운 시절"에서 한우산을 내려오는 장면을 촬영했던 곳입니다.
영화에서처럼 안성기·송옥숙 일가의 몰락하는 가정사가 이 산자락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습니다.
우마차를 끌고 산자락을 굽이굽이 내려오는 인생의 역경을 상징화한 마지막 장면이 이곳 풍경을 빌린 것입니다.
봄철에는 철쭉이 군락으로 피어나 산 전체가 벌겋게 물들어 가족 단위의 등산객들이 1일 등반코스로 즐기며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상공에서 연출하는 오색의 패러글라이더도 장관입니다.
* 한우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계곡, 벽계(찰비)계곡 *
찰비계곡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구비치고 흘러서 폭포를 만들어 일대장관을 이루는 천하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흐르는 폭포수는 곳곳에 소를 만들어 놓았는데 각시소와 농소, 아소 등이 유명하고 여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포수와 웅덩이의 물이 너무 맑아 주위에 아름다운 숲들이 물에 비쳐서 선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철과 가을철에 많은 관광객이 찰비계곡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은 계곡아래쪽에 있는 벽계관광지와 벽계저수지 등으로 인해 종합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어 야영객과 낚시꾼 등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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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산 기본 정보
충익사(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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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사(의령) 소개
충익사는 임진왜란(1592)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홍의장군 곽재우와 그 휘하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곳에서는 1972년 이래 해마다 곽재우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사당은 충익사당, 기념관, 충의각, 내삼문, 외삼문 등 9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보물 ‘망우당(忘憂堂)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공포와 장식이 화려한 충의각에는 곽재우와 17명의 장수들에게 사후에 내린 관직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밖에 도기념물인 모과나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 27m에 이르는 충혼탑이 있습니다.
*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
곽재우 장군은 명종 7년(1552)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하였는데 문무에 다같이 뛰어났으나 관직 없이 초야에서 지냈다.
선조 25년(1592) 4월13일 왜병이 침입하여 서울로 진격해오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의 침공을 막았습니다.
장군은 홍의에 백마를 타고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 의병을 거느리면서 정암진, 기강, 현풍, 창녕, 화왕산성, 진주성 등의 전투에서 실로 신출귀몰하는 전략, 전술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백전백승함으로써 왜병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목사를 지냈고, 한성부 우윤, 함경도 관찰사를 일시 역임하였습니다.
장군은 사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사에 추증되었습니다.
장군의 추모행사는 1972년 이래로 매년 거행하며 1978년 이곳에 사당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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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사(의령) 기본 정보
벽계(찰비)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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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계(찰비)계곡 소개
* 아름다운 경관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 벽계(찰비)계곡 *
자굴산으로부터 이어지는 맥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어 곳곳에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절경이 즐비한데 한우산을 끼고 흐르는 계곡이 찰비계곡입니다.
이 계곡의 골짜기에는 천연의 요새처럼 석벽이 들러있어 그 모양이 성벽을 방불케하여 이름지어진 한우산성이 있습니다.
찰비계곡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굽이치고 흘러서 폭포를 만들어 일대장관을 이루는 천하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흐르는 폭포수는 곳곳에 소를 만들어 놓았는데 각시소와 농소, 아소 등이 유명하고 여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포수와 웅덩이의 물이 너무 맑아 주위에 아름다운 숲들이 물에 비쳐서 선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철과 가을철에 많은 관광객이 찰비계곡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은 계곡아래쪽에 있는 벽계관광지와 벽계저수지 등으로 인해 종합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어 야영객과 낚시꾼 등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 저수지와 계곡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여행코스, 의령 벽계관광지 *
의령군 궁유면과 유곡면 일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79년에 만든 벽계저수지와 봉황대·벽계계곡 등을 연결하여 조성한 관광지입니다.
저수지는 산과 산을 가로막아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잉어와 향어·빙어 등 어종이 다양하여 낚시터로 인기있습니다.
저수지를 따라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에 경치가 아름답다.
저수지 상류에 야영장이 있고 남서쪽 상류에는 민속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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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계(찰비)계곡 기본 정보
탑바위(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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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바위(의령) 소개
의령읍에서 동쪽으로 약 10㎞ 덜어진 정곡면 죽전리 남강변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는 흡사 탑(塔)모양을 닮은 층층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탑바위'입니다.
이 바위는 약 20톤 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높이 8m 가량의 작은 바위가 마치 탑의 옥개석처럼 올라있습니다.
자연의 조화치고는 매우 신기한 형상입니다.
탑바위 아래로는 남강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강 건너편은 끝없이 넓은 들판이 활짝 펼쳐져 있어 가히 절경입니다.
거기에다 기화요초(奇花妖草)들이 만발한 뒷산의 경치조차 한층 아름다움을 북돋워준다.
더욱이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전승지로도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의령군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전승지가 여러 군데 있는데, 이 곳 탑바위는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유곡면 세간리와 가깝고 남강변에 촘촘히 복병을 매복해 두었습니다가 왜군의 내습에 대비했던 기록들로 미루어 이곳 탑바위의 싸움도 여간 치열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탑바위 일대의 절경은 강물을 따라가는 배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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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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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의령) 소개
미타산(彌陀山, 높이 662m)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입니다.
약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습니다고 전하는 고찰(古刹)입니다.
조선 개국 직후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 자초(自超 1327~1405)가 1399년(정종 1년) 창건하였습니다.
무학대사는 660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금의 유학사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고 합니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극락전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만세루, 극락전 왼쪽에 종각, 극락전 오른쪽으로 요사 두 동이 아래·위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칠성각은 요사 뒤쪽의 계단 위쪽에 있습니다.
주법당인 극락전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내부 불단에 금동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원래 오동나무로 만든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가 1980년대에 어디론가 이운되었습니다 합니다.
그때 삼존불 중 주존불을 본떠 석고상으로 남겨 두었는데 2002년 새로 조성한 현재의 주존불은 그 석고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만세루(萬歲樓)는 루(樓)의 입지 즉 사찰의 정문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지만 실제 누각 형식의 건물이 아니다.
단층 건물인 데다 누문도 없으며, 툇마루가 달린 요사채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건물 뒤편에 걸려 있는 편액도 유학사(留鶴寺)라고 되어 있지만 사찰에서는 만세루라고 부른다.
이 건물에는 1900년 이태현(李泰鉉)이 지은 ‘법당중수기’ 등 유학사의 연혁을 알려주는 현판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 무학대사와 유학사의 이야기 *
원래 유학사는 미타산의 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조선 초기 때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를 지낸 무학대사가 이 유학사에 들려 사찰이 앉은 위치가 풍수지리에 맞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 절을 옮겨지었습니다는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에 무척 밝았기 때문에 당시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 개국과 함께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는 일화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유학사의 전설 또한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닐 것으로 믿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부근의 형세가 마치 날아가 학의 형상을 닮았습니다고 하고, 예전에 유학사가 있던 자리는 그 학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였습니다 하니 학의 머리에 절이 앉아서는 아니 되고 지금의 위치에 사찰이 있어야만 학이 마치 절을 품고 있는 형상이 되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찰의 이름도『학이 절을 품은 채 머무른다』는 뜻으로 유학사라 하였습니다고 합니다.
이때가 조선 초기 정종 2년(1399년)이라 알려지고 있으며 그 뒤 무학대사는 오랫동안 이 유학사에 머물고 있습니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말은 지금에 와서 상고할 길이 없고, 다만 그러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습니다는 사실만 기록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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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사(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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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사(의령) 소개
일붕사는 천혜의 자연 요건을 갖춘 봉황산에 위치한 사찰입니다.
이 사찰이 유명한 것은 동굴법당. 이 법당은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습니다.
이 법당의 크기는 456.2m²(138평)과 297.5m²(90평). 현재 불자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 도량으로 하루 평균 2백여 명의 불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일붕사는 사찰대지 16,529m²(5천평), 임야 99,174m²(3만여평), 신도수 2천여세대, 석굴 대웅전 456.2m²(138평), 석굴무량수전 297.5m²(90평), 제1요사, 제2요사, 조사전, 약사전, 북극전, 나한전, 산신각, 종각 등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서기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입니다.
일붕사는 약 1330년 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때 최고의 격전지였다.
당시 왕군이 봉황대 영역 안에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고 합니다.
태종 무열왕의 삼왕자가 계셨던 궁소 봉황대의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을 안치시켜 호국 일념으로 성덕왕의 덕을 기렸고 성덕대왕이 봉황대의 산세가 빼어남과 선당의 얼이 베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귀족적 사찰을 지었으니 과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덕사도 이조 성종25년 국령으로 불사 33개소를 회합함으로서 그 영향을 받아 승려를 학대하고 사찰을 파괴함으로서 봉황대 성덕사는 어쩔 수 없이 사찰을 궁류면 운계리 팔사곡 자사산으로 옮겨 정수암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8년전)에 장사곡 출신의 어떤 인물이 들어와 승을 축출하고 암자를 파괴할 때 쇠망치로 수없이 내려쳐도 미륵불상 한불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주승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그 불상을 업고 합천군 연호사로 도망하였습니다고 합니다.
지금의 연호사 불상 중 일부분이 성덕사 불상이라고 전해온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암자로 있습니다가 1934년 8월 26일 당시의 면장이 산주와 더불어 봉황대의 덕경을 도우기 위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관세음보살상과 여래불상을 모셨으나 소실되어 다시 이야용 스님이 법당을 짓고 성덕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1984년 10월 24일 누전으로 인하여 또다시 성덕사법당이 완전 소실되었으나 1986년 7월 26일 사단법인일붕선종회 (지금의 재단법인 일붕선교종) 창종주 일붕 서경보 종정 큰스님이 혜운 주지스님을 부임케하여 이 산 이름이 봉황산이라 산의 기가 너무 세어 사찰이 부지 못하니 기를 줄이기 위해 굴을 파야 합니다고 하시므로 주지스님이 불사를 이룩, 사찰명을 일붕사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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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사(의령) 기본 정보
지금까지 경남 의령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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