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 갈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경기도 여주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여주 서화마을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여주 서화마을 소개
서화마을은 농촌체험뿐 아니라 주변에 야생화 화분을 만들 수 있는 농원이나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한적하고 완만한 등산로도 있어 각종 체험활동을 하기에 좋은 마을입니다.
다양한 명소들이 즐비하고 마을 전체가 산줄기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늘 양지바르며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정겹고 아늑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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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서화마을 기본 정보
여주 양화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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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양화나루 소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내양리 양화동과 대신면 초현리를 이어주는 조선시대의 나루터로 ‘내양나루’라고도 하였습니다.
곡수장을 찾는 이들이 소를 팔기 위해 이 나루를 이용했습니다고 합니다.
강변에서 바라보는 여주 강변의 경치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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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양화나루 기본 정보
여주 이포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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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이포나루 소개
이포는 배가 닿는 터라는 뜻으로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를 연결하는 삼국시대의 나루터입니다.
조선시대 4대 나루터에 속했던 곳으로 가장 최근까지 존재했던 나루이며, 이포나루(驪州梨浦)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91년 천서리로 건너가는 이포대교가 건설되면서 나루가 소멸하였으나, 2009년 복원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여주 이포나루 기본 정보
여주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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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온천 소개
삿갓봉 꼭대기에 위치한 여주 유일의 온천입니다.
나트륨을 비롯한 천연 미네랄이 듬뿍 함유된 약알칼리성 온천수로 피부염이나 아토피 질환에 효과를 보았습니다는 사람들이 많다.
손으로 만져보면 미끌미끌한 온천수는 꾸준히 마시면 위장을 건강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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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온천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www.yeojuspa.co.kr
운영 시간 06:00~21:00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쾌적한 목욕장 관리를 위해 매주 수요일 휴무
봉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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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정 소개
봉서정은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 수부말마을 내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정자입니다.
원래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광주 이씨 문중이 1995년 지금의 위치에 2층 누각으로 중수한 것입니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단청을 화려하게 채색하였으며, 정면엔 이형재(李衡載)가 쓴 “봉서정(鳳棲亭)”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봉서정은 고려말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 1314~1387)이 이포(梨浦)로 낙향해서 세운 정자입니다.
이집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호연(浩然)으로 1349년(충목왕 3)에 과거급제해서 관직에 진출하였고 포은 정몽주(1337~1392), 목은 이색(1328~1396) 등과 교유했습니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 ?~1371)의 전횡을 비판하여 미움을 받자,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경상도 영천의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 집으로 피신하여 4년간 은둔하였습니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의 천령현(川寧縣, 지금의 이포 일대)으로 내려가 봉서정을 짓고 논시강학(論詩講學)하며 주경야독으로 소일하였습니다.
정몽주가 봉서정으로 이집을 심방(尋訪)하여 국정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색의 침류정(沈流亭)과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284)의 육우당(六友堂)도 이웃에 있었습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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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정 기본 정보
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과 영릉(寧陵)효종,인선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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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과 영릉(寧陵)효종,인선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소개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습니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습니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 음력 8월10일 (양력 9월18일)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 영릉의 특징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됩니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습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습니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습니다.
* 전시유물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 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습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세종대왕의 업적
1) 한글창제
대왕은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 9월(음력) 에 이를 반포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통한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학문창달
대왕은 특히 학문을 사랑하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습니다.
우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습니다.
3) 과학의 진흥
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습니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등 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천문·지리 등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4) 외치와 국방
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는 한편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 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습니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습니다.
5) 음악의 정리
조선 초기 까지의 음악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이 서로 혼합되어 무질서한 상태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정리하였는 데, 이는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이었습니다.
대왕은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입니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 효종대왕릉의 형태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습니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조선시대 왕릉의 형태를 보면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입니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 대동법과 상평통보, 효종에 대하여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습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습니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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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과 영릉(寧陵)효종,인선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ejong.cha.go.kr
운영 시간 2~5월, 9~10월 : 09:00~18:00
6~8월 : 09:00~18:30
11~1월 : 09:00~17:30
※ 매표는 관람마감 1시간 전까지 가능
주차시설 있음(소형주차장 183대, 대형주차장 52대)
쉬는 날 매주 월요일
영월루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영월루 소개
여주읍에서 신륵사로 가는 길에서 여주대교 조금 못미쳐 우측고대위에 푸른숲으로 둘러싸인 고풍의 한 누각이 보이는데 이것이 영월루입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架構)로 보아 18세기 말경의 건물로 추정됩니다.
영월루는 원래 여주시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당시 신현태(申鉉泰)군수가 파손 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위쪽에는 1958년에 이건된 창리 삼층석탑(보물)과 하리 삼층석탑(보물) 이 있습니다.
상층 누마루에 올라보면 숲속에 파묻힌 유명한 절 신륵사의 대가람이 한강변에 바라보이고, 학동모연·팔대장림·마암어등 등의 여주팔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각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는데 바위 위에는 힘있는 필치로 씌어진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암혈에서 황마(黃馬)·여마(驪馬)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이것이 구전되어 여주군명을 황려(黃驪)라 칭했습니다는 것입니다.
이 황려의 군명은 후에 여흥이라했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여주로 변한 것인데 이「여(驪)」자는 황마승천설에서 유래했습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 영월루의 형태와 구조 *
영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2층 누각 형식인데 정면길이에 비하여 측면길이가 짧으므로 평면은 긴 장방형입니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높은 사각 초석 위에 짧은 하층 기둥이 세워져 누마루가 꾸며지고 그 위에 상층 기둥이 세워져 이익공과 결구되고 오량의 지붕가구가 짜올려져 있습니다.
창방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문루의 가구법과 유사하다.
상층의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수법으로 미루어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됩니다.
영월루는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입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낮은 기단과 길다란 몸체, 그리고 치켜 들려진 팔작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되어 있습니다.
[문화재 정보]
- 지정종목 : 경기문화재자료
- 지정연도 : 1983년 9월 19일
- 시대 : 조선
- 종류 : 누각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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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루 기본 정보
홈페이지 여주 문화관광 http://www.yeoju.go.kr/main/culture/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운영 시간 00:00~24:00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연중개방
여주도예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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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도예단지 소개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고려 말부터 도자기 제조를 시작하였으며 조선 초기부터 발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내면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나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재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곳의 중견 작가들은 근래에 전승 도예를 깊이 연구하면서 독특한 수법으로 특이한 신작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기, 화분, 식기, 전기부품 등 생활용품을 대량 생산합니다.
* 여주도 예 단지의 볼거리 *
여주도 예 단지 관광의 장점은 도자기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도자기 제조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는 것. 단지 내에 여주 민속 도자기 조합과 도자기 종합전시관 외 60여 개의 개인 전시관이 있어 다양한 도자기를 관람할 수 있으며, 각 도요지마다 도자기의 제조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년 5월에는 세종대왕 숭모제전과 함께 여주 도자기 박람회를 실시하여 색다른 관광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신륵사 국립 관광지, 세종대왕릉(영릉), 효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영월루, 목아 불교 박물관 등의 관광지가 있어 연계 관광으로 좋다.
이곳 부근엔 신륵사 국민 관광지와 영릉, 고달사지 등 문화 유적지가 많아 학생들의 문화유적 탐방지로 적합한 곳입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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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도예단지 기본 정보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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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소개
* 명성황후 생가에 대하여 *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입니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습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습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입니다.
* 명성황후 기념관에 대하여 *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明聖皇后, 1851~1895)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시실은 면적 520㎡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합니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념관 옆에 있는 161석의 공연장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명성황후의 개화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우측 산쪽 150m 지점에 그분의 묘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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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www.yjcf.or.kr/main/empressmyungseong
운영 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관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주차시설 있음 (총 88면 / 승용차 64면 + 장애인 4면 + 대형 20면)
쉬는 날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여주 파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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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파사성 소개
이 성은 해발 250m 정도의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석축산성입니다.
성의 일부는 강기슭에 돌출되게 자리 잡아 상하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파사성은 성벽 등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약 1,800m 정도이며 성벽 중 최고 높은 곳은 6.25m나 되며 낮은 곳은 1.4m 되는 곳도 있습니다.
천서리를 면한 동문지(東門址), 금사면 이포리를 면한 남문지(南門址)에는 문앵(門櫻)을 세웠던 고주형 초석 2기와 평주 초석이 남았고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地)가 남아 있습니다.
파사성은 신라 제5대 임금 파사왕 때 처음 쌓았습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군 총익인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쌓은 둘레 1,100보의 성첩을 중수한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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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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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파사성 기본 정보
홈페이지 여주 문화관광 http://www.yeoju.go.kr/main/culture/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주차시설 주차가능
쉬는 날 연중개방
지금까지 경기도 여주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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