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 갈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경기도 양주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신흥레저타운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신흥레저타운 소개
양주시는 경기도의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의정부시, 구리시, 동두천시, 미금시, 남양주시을 포함했었으나, 4개 시와 남양주시가 독립하면서 분리됨에 따라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동쪽은 포천시, 서쪽은 파주시와 고양시, 남쪽은 서울시와 의정부시, 북쪽은 연천군, 북동쪽은 동두천시와 연천군에 접하고 있습니다.
주시 남쪽에 있는 북한산 국립공원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신흥유원지는 주말에 교외선 열차를 타고 다녀오기 좋은 유원지입니다.
장흥역에서 의정부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야산 기슭에 터를 잡았으며 오봉산, 도봉산, 원효봉, 인수봉, 백운대를 바라보며 맑은 곡릉천을 끼고 있습니다.
면적 132,000㎡(4만 평)에 수영장, 각종 구기운동장(족구장, 축구장)과 위락 및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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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레저타운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www.신흥레져.kr
운영 시간 [수영장] 09:00~18:00 (점심시간 12:00~13:00)
※ 매 시간 50분 수영 후 10분간 휴식
주차시설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일영유원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일영유원지 소개
양주시는 경기도의 중앙 북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의정부시, 구리시, 동두천시, 미금시,남양주군을 포함했었으나, 4개 시와 남양주군이 독립, 분리됨에 따라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동쪽은 포천시, 서쪽은 파주시와 고양시, 남쪽은 서울시와 의정부시, 북쪽은 연천군, 북동쪽은 동두천시와 연천군에 접하고 있습니다.
수영장과 보트장 및 숙박시설이 있으며 곳곳에 넓은 잔디밭과 소나무 숲이 있어 경치가 좋고 시원하여 가족들이 함께하는 휴식처로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봄·가을 소풍, 대학생 MT장소, 캠핑장소로도 많이 이용됩니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계곡 안 1.5km 지점에 주말농장이 있으며, 349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가족농장, 식당,청소년수련장, 야외조각공원 등을 갖춘 "해맞이 동산"이 있습니다.
일영유원지 기본 정보
권율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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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묘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권율(權慄,1537∼1599)과 정부인 창녕 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입니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습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서 왜적을 대파시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이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둔다.
권율은 이 공으로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습니다.
선조 32년(1599) 관직을 물러나 그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封墳)앞에 묘비(墓碑)·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상석(床石)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세웠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
권율의 묘역은 이러한 원칙에 비교적 충실히 하였습니다.
권율의 묘소에는 묘비(墓碑)·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각1기씩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望柱石)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동자석·문인석(文人石)이 각 1쌍씩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닳아 없어져 철종 12(1861)에 권율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입니다.
1971년과 1999년 정화사업으로 묘를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 시대 - 조선 선조 32년(1599)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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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묘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yangju.go.kr/tour/index.do
http://www.cha.go.kr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양주 온릉(단경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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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온릉(단경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소개
※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있어 공개하지 않고 비공개로 관리해온 양주 온릉 개방
※ 2019년11월14일 무료 시범 개방
※ 시범 개방대 대한 문의사항 : 02-6450-3837
조선 중종(中宗)의 원비(元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입니다.
왕후는 연산군 때 좌의정이며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499년(연산군 5) 13세로 진성대군(晉城大君)이던 중종과 가례를 올리고 반정(反正)으로 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반정과정에서 반정 주체세력이 신수근을 살해하고 왕에게 강권하여 폐출시켰으며 왕후는 1557년(명종 12) 사저에서 71세로 승하하여 신씨 묘역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뒤에 곡원(曲垣)을 두르고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필로 호위하게 하였고 능 앞에는 상석(床石)과 장명등을 세우고 망주석(望柱石)· 문석(文石)·마석(馬石)을 배치하였습니다.
동물 모양의 조각을 반으로 줄인 것은 비릉(妃陵)으로 봉해진 무덤의 예에 따른 것입니다.
무덤 아래에는 제사지내는 방(제실)이 있었으나 1970년 도로 확장 때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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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온릉(단경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royaltombs.cha.go.kr/
운영 시간 2~5월, 9~10월 : 09:00~18:00
6~8월 : 09:00~18:30
11~1월 : 09:00~17:30
쉬는 날 매주 월요일
양주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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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소개
회암사는 고려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습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 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특히 명종 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 집이 되어 버렸다.
이 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또한, 모셔진 불상도 15척짜리가 7구나 있었습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운허요하가 쓴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으며,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후설에 의하면 회암사의 폐사는 빈대가 많아 불을 태워 없앤 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소실됐습니다는 설도 있고 또한 절의 크기에 대해서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만큼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하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커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며,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습니다"고 합니다.
옛 회암사는 문헌상 동방의 첫째였고 우리나라의 국찰이었으나 폐허가 된 후 사지에 석벽과 기단, 계체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 문화재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회암사지 부도 (보물),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회암사지 멧돌 (경기도 민속자료),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회암사지 당간지주 (향토유적)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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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기본 정보
불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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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곡산 소개
불국산으로도 불리는 불곡산은 해발 47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대동여지도'에 양주의 진산으로 나와 있습니다.
양주시 유양동 및 산북동의 경계에 솟아있으며 서울 근교의 다른 산과 달리 주말에도 붐비지 않아서 좋다.
산의 규모는 작으나 기암들로 이어진 오밀조밀한 산세를 자랑합니다.
인근의 도봉산에 밀려 빛을 못보고 있으나 교통이 편리한데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만발하는 산입니다.
특히 유양동에는 옛 양주군 관아지를 비롯해 문화 유적들도 산재, 자녀교육을 겸한 나들이 장소로 제격입니다.
또한 산 중턱에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습니다는 백화암이 있습니다.
백화암 밑에 있는 약수터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습니다고 전합니다.
백화암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험한 편입니다.
정상의 암벽 지대는 겨울철 눈이 내리면 위험한 코스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양주시와 의정부시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유양리에는 양주목사가 4백여년간 행정을 펴던 동헌과 어사대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양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양주별산대놀이(국가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양주목사가 휴식을 취하던 금화정, 양주산성 (경기도 기념물) 등 문화재가 모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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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곡산 기본 정보
양주 대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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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대모산성 소개
이 성은 일명 양주산성(楊州山城)이라고도 하는데, 해발 213m 대모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곳은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의정부 쪽으로 내려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산성의 둘레는 약 1.4km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북문 터 좌,우측과 동쪽 등 3개소에 약 70~80m 정도 잘 남아 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고 아랫부분의 폭은 주변의 지세에 따라 가파른 남쪽은 6m, 완만한 북서쪽은 8m쯤 됩니다.
성벽은 표면이 잘 다듬어진 할석으로 경사지게 들여쌓기 하였으며, 성벽 하단부 바깥쪽에는 보축 성벽을 쌓아 성벽의 안정성을 높였다.
성문은 3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다락문인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신라성에서 주로 발견되는 양식입니다.
성 내부에는 군창(軍倉)터를 비롯하여 건물터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이 있으며 우물이 5곳 있었습니다.
유물은 대부분 건물 터 내부와 추정 저장공, 문터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농기류, 마구류, 건물부재, 일반 생활용구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驪州)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백제,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출토 유물 중에는 덕부사(德部舍), 국(國), 부(富), 대부운사(大浮雲寺) 등의 명문 기와가 발굴되어 주목됩니다.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석축 성벽은 삼국 시대 때 신라에 의하여 쌓아져 고려, 조선 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북문 터 북쪽에서는 백제계 토기가 많이 출토되어 석축(石築) 성벽이 축조되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는 토루나 목책 등의 방어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양주 대모산성 기본 정보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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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묘 소개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고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습니다.
족보를 확인하는 어려운 작업 끝에 간신히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위치해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거의 방치돼 있는 상황입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남인(南人)의 명문(名門) 출신입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이를 계기로 결국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합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그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습니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됩니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입니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몰락하고 그 여파로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습니다.
귀중한 교회 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치열한 당쟁이었음을 피력한 다음 세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시 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습니다.
* 시대: 1775년~1801년(영조 51년~순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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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묘 기본 정보
운영 시간 24시간
주차시설 없음
쉬는 날 연중무휴
양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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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향교 소개
1401년(태종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습니다.
6·25 때 폐허화되었던 것을 1959년에 중건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5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습니다.
이 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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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향교 기본 정보
양주 도자기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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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도자기나라 소개
도자기나라는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자기 및 공예체험에 관심이 있습니다면 누구나 방문이 가능한 곳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와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도자기에 관련된 여러가지 체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들기, 초벌된 기물에 그림 그리기, 물레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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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도자기나라 기본 정보
지금까지 경기도 양주 갈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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